[세계기행] 왜 사람들은 페그오 스토리에 열광할까?
2021.01.31 14:59 게임메카 이새벽
최근 페이트 그랜드 오더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물론 원인은 국내 서비스 문제 때문이긴 하지만, 화제가 크게 되다 보니 일반인들도 페이트 그랜드 오더가 무슨 게임인지, 그 원류가 되는 페이트가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 일단 많이들 알듯, 페이트 시리즈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유명한 역사/신화 속 영웅이나 위인들이 시공을 초월해 크로스오버를 벌이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페이트 시리즈는 특유의 깊은 세계관 탓에 고유명사도 많고 게임과 애니메이션, 소설, 만화 등에서 다방면으로 시리즈가 전개됨에 따라 스토리도 매우 복잡해져서 신규 유저 입장에서는 스토리 따라가는 건 고사하고 설정을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대체 페이트는 뭐 하는 게임이고, 왜 아서 왕이 금발 미소녀로 나와서 시간여행을 하는 걸까? 지난 ‘월희’편에 이어, 이번 주에는 페이트 시리즈의 설정과 스토리를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자.
아서 왕이랑 헤라클레스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지난 주 월희를 소개할 때 언급했듯, 본디 노츠는 회사 설립자인 타케우치 타카시가 주축이 된 아마추어 동호회 타입문이 그 모태였다. 그리고 첫 게임 월희가 큰 화제를 끌자 동호회장이었던 타케우치는 이를 유한회사 노츠로 전환했다. 그렇게 세워진 노츠가 처음으로 만든 게임은 월희 후속작이나 리메이크가 아니었다. 바로 새로운 게임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였다.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의 뿌리는 월희와 비슷했다. 월희 시나리오 라이터였던 나스 키노코가 다시금 시나리오를 맡았고, 장르도 21세기 일본 도시 이면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 존재들의 암투를 다룬 어반 판타지였다. 또한 월희가 선정적 내용이 포함된 성인용 게임이었던 것처럼,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도 성인물로 기획됐다. 다수의 여주인공이 있으며, 그 중 누구와 가까워지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스토리로 전개되는 분기 시스템도 동일했다.
다만 내용 면에서는 전작과 큰 차이가 있었다. 월희는 뱀파이어나 오니의 피가 섞인 반인반요 가문의 더러운 과거 등 어두운 소재를 주로 다뤘다. 그렇기에 인물들 사이의 질척한 관계나 선정적인 묘사도 비교적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반면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는 마술사가 소환한 지난 시대 영웅들의 혼이 모여 배틀로얄을 벌인다는, 보다 활극에 가까운 내용을 다뤘다. 상대적으로 덜 음침하고 대중적인 소재다.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는 현대에도 마술을 사용할 수 있는 마술사들이 있어, 정체를 감추고 사회 이면에서 자신들끼리 암투를 벌이고 더 큰 힘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다. 다만 마술사들도 하이랜더 마냥 막무가내로 서로 죽여서 힘을 흡수하는 것은 아니고 규칙이 있다. 그러한 규칙 중 하나가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주요 소재가 되는 성배전쟁이다. 짧게 요약하면 마술 의식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성배를 소환하고, 이를 독점하기 위한 결투를 벌이는 것이다.
몇 세기 전 독일 인조인간 마술사 가문인 아인츠베른과 일본 마술사 가문 토오사카, 마토가 힘을 합친 결과, 이들은 일본의 한 소도시에서 모종의 마술의식을 통해 원하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매개체인 성배를 제작했다. 그러나 성배는 한 번에 한 소원만 들어줄 수 있었고,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막대한 영적 에너지가 충전되어야 했다. 이에 성배를 제작한 세 가문은 소원을 빌 권리를 얻기 위해 성배가 충전될 때마다 의식적인 결투를 벌이게 됐다. 이것이 성배전쟁의 시작이다.
이 성배전쟁에는 독특한 무기가 쓰인다. 각 가문을 대표하는 마법사들은 한을 갖고 죽은 영웅의 넋을 초혼해 계약을 맺고 구속한다. 결투에 이기면 영웅의 혼이 생전에 이루지 못한 염원도 함께 소원으로 빌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법사들은 한 시대를 풍미한 날고 기는 영웅들을 소환해 정해진 기간 동안 시내에서 배틀로얄을 벌이고, 이긴 팀이 패배한 팀 영웅의 혼을 성배에 넣어 에너지로 사용해 소원을 빌게 된다.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가 시작되는 시점에는 이미 네 번의 성배전쟁이 진행됐고, 이제 다섯 번째가 시작하는 참이다. 다만 다섯 번째 성배전쟁에 참전하게 되는 주인공 에미야 시로는 다소 예외적 존재다. 왜냐하면 그는 성배전쟁을 고안한 세 가문에 소속되거나 초청받은 것이 아닌 아마추어 고등학생 마술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네 번째 성배전쟁에 아인츠베른 가문 측 용병으로 참전했던 마술사가 은퇴한 후 들인 양자로, 기본기는 배웠지만 제대로 된 마술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미야 시로가 성배전쟁에 참가하는 마술사로 선택된 이유는 그의 양부와 관계가 있다. 양부인 에미야 키리츠구는 자신의 잘못으로 도시에 마술적 화재가 발생해 많은 민간인이 죽게 되자, 가족을 모두 잃고 죽어가던 한 아이에게 자신이 가진 유물인 엑스칼리버 칼집을 이식했다. 엑스칼리버 칼집은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을 지닌 유물이었기에 아이는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에미야 키리츠구는 되살린 아이를 입양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에미야 시로다.
즉 에미야 시로는 이미 자기 몸 안에 아서 왕과 관계가 있는 유물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 그는 우연히 성배전쟁을 위해 소환된 영웅 쿠 훌린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이에 쿠 훌린은 목격자 제거를 위해 에미야 시로를 쫓아가 찌르나, 전학생인 줄 알았던 또 다른 마술사 토오사카 린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혼비백산해 집으로 도망친 에미야 시로는 자구책이 될 만한 것을 찾던 중 우연히 전대에 사용된 소환진을 발동시킨다.
본래 성배전쟁에 소환되는 영웅은 마술사가 소환의식에 사용한 매개물에 따라 결정된다. 에미야 시로는 엑스칼리버 칼집을 매개물로 썼기에, 그에 응해 소환된 영웅은 당연 아서 왕이었다. 그런데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세계관은 어쩐지 아서 왕이 금발 미소녀고 이름도 아르토리아로 바뀌어 있다. 어쨌든 엉겁결에 아르토리아를 소환한 에미야 시로는 마찬가지로 약세에 있던 토오사카 린과 임시 휴전을 맺고 함께 강적들에 맞서기 위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이후 게임은 주인공 에미야 시로가 소환한 아르토리아, 나머지 강팀들을 물리칠 때까지 휴전을 맺은 토오사카 린, 평범한 후배인 줄 알았는데 실은 강력한 마술사 가문인 마토의 예비 참가자였던 마토 사쿠라까지 세 명의 여주인공을 내세워 진행된다. 이 중 어느 쪽과 더 자주 엮이는 선택지를 고르는지에 따라 각기 다른 스토리로 진행되는 식이다. 다만 특이하게도 각 분기가 처음부터 가능한 것은 아니며, 반복 플레이를 통해 순차적으로 다음 스토리 분기가 해금되는 전개를 택했다.
대략의 전개를 요약하면, 우선 성배는 이미 전전대에 발생한 모종의 사건에 의해 오염돼 있었다. 당시에 한 마술사가 자신이 승리하기 위해 본래대로면 소환할 수 없는 기이한 존재를 우회적인 방법으로 소환해낸 결과 신적인 존재 앙그라 마이뉴가 소환된 것이다. 그러나 소환된 상태의 앙그라 마이뉴는 예상 외로 약했다. 페이트 세계관에서 앙그라 마이뉴란 본래 신이었던 존재가 아니라, 원시 공동체가 모든 악을 짊어지고 대신 죽어줄 종교적 희생양으로 선택해 살해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그라 마이뉴가 패배하고 그 힘이 성배에 먹히자 문제가 발생했다. 앙그라 마이뉴는 존재 자체에 옛 사람들이 염원한 ‘네가 이 세상의 모든 악이 되라’는 소원이 각인돼 있었다. 그렇기에 앙그라 마이뉴가 먹힌 순간 성배는 이를 소원으로 받아들였고, 앙그라 마이뉴를 자신과 융합해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 탓에 이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시점 성배는 제대로 된 기능을 못하고 있는 데다, 인류를 멸망시킬 신적 존재를 배양하고 있었다.
각 스토리 분기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결말은 크게 차이가 난다. 다만 게임은 대체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 에미야 시로가 성배를 파괴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러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사건들을 통해 공식 설정상 이후로도 성배전쟁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설정과 별개로 페이트 시리즈는 성배가 파괴된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이후로도 계속 확장되는데, 대개는 과거사를 다루거나 평행세계를 다루는 식으로 전개됐다.
정리하자면,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는 두 가지 특징을 내세웠다. 첫 번째는 실존했던 옛 영웅이 소환돼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은 크로스오버를 벌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스랑 여포가 싸우면 누가 이기냐?’ 식의 VS 드림 매치를 성사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실존하는 영웅상을 재해석하는 것이기에, 새로 캐릭터를 밑바닥부터 개발하는 것보다 인지도에 있어 훨씬 더 대중적인 어필이 가능했다. ‘아서 왕이 금발 미소녀로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관심을 끌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두 번째 특이한 점은 이와 같은 VS 드림 매치를 제도화했다는 것이다. 마술사 ‘마스터’와 소환된 죽은 영웅의 혼 ‘영령’이 한 쌍으로 팀을 이루고, 한 팀이 다른 팀들을 정해진 공간에서 제한된 시간 내에 전멸시킬 시에는 보상으로 소원을 빌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을 제도적으로 정립해서 동일한 틀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쉽게 안배한 것이다. 덕분에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는 다양한 팬 소설이 빠르게 쏟아질 수 있었고 미디어믹스 또한 용이했다.
실제로 페이트 시리즈는 성인게임 시나리오 라이터이자 훗날 영상물 ‘마도카 마기카’ 각본가로 유명해지는 우로부치 겐이 2006년부터 연재한 소설 페이트 제로로 미디어믹스를 시작했는데, 그 내용 역시 게임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직전 벌어진 네 번째 성배전쟁을 배경 삼았다. 여기서도 옛 시대 영웅을 소환해 드림 매치를 벌인다는 점, 그리고 성배전쟁이라는 규칙에 따른 제도화된 배틀로얄을 벌인다는 점 등은 동일했다. 이러한 설정은 게임과 마찬가지로 큰 호평을 받았다.
우리 이제 성인물 아냐, ‘19금’ 딱지 뗀 ‘레알타 누아’와 외전들
앞서 언급했듯 노츠는 성인용 게임을 만드는 아마추어 동호회 타입문에서 시작했고, 이들이 만든 첫 게임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도 성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게임에서는 마술사가 소환된 영웅에게 마력을 전달해주는 수단의 일환으로 성적 행위가 묘사되기도 했다. 성적 접촉과 체액 교환을 통해 마술사의 마력을 영웅에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성적 묘사는 ‘마력공급’이라는 설정으로 합리화돼 게임 내에서 자주 언급됐다.
이러한 성인물로서의 정체성은 2005년 출시된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의 후일담 겸 외전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할로우 아타락시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2006년 미디어 믹스 ‘페이트 제로’가 연재되기 시작된 이후 사정이 바뀌었다. 소설화까지 되며 인지도가 올랐기에, 슬슬 원작의 선정성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특히 원작은 선택지에 따라 꽤 하드한 성적 묘사도 있었기에 더욱 문제가 됐다.
이러한 점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노츠는 2007년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의 PS2 버전 수정판인 ‘레알타 누아’를 발매했다. 레알타 누아는 줄거리에 있어서는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와 큰 차이가 없고, 달라진 부분은 CG, BGM, 보이스 추가 등 연출 강화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성인물 요소를 모두 배제시켰다. 한마디로 전연령 보강판이었다.
이후로 노츠는 페이트 시리즈에서 성인물 색을 빼는 데 집중했다. 2007년 발매된 ‘페이트 타이거 콜로세움’이나, 2008년 발매된 ‘페이트 언리미티드 코드’는 노츠 측이 라이선스만 제공하고 개발과 유통을 다른 회사에서 맡은 데다 장르도 대전 격투 게임이었으니 성인물 요소가 없을 만도 했다. 하지만 2010년 출시된 RPG ‘페이트 EXTRA’는 노츠가 제작에 참여하고 나스 키노코가 시나리오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인물 요소가 없고 SF 색채를 내세운 작품이었다.
페이트 EXTRA는 원작처럼 성배전쟁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지만, 배경은 아예 2030년 평행세계로 잡고 있다. 여기서는 1970년대에 지구의 마력이 고갈되며 마술이 사라지고 각종 자연재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성배전쟁이 이미 중단된 건 물론이요, 환경 변화와 자원 고갈로 국가들이 무너지고 인구가 급감하는 등 대이변이 발생 중이다. 그러던 중 월면에서 기이한 외계 유물이 발견된다. 심지어 이 유물은 스스로 인간에게 디지털 접촉을 감행해왔다.
이 달의 유물 문 셀 오토마톤은 정기적으로 인간들 중 마술적 재능을 타고 난, 그리하여 그 재능을 디지털 기술과 결합해 일종의 테크노맨서가 된 마술-해커인 ‘위저드’들을 초청한다. 그 초청을 받고 문 셀 오토마톤이 만든 방화벽을 뚫은 후 사이버스페이스로 의식을 보내는 데 성공한 이들은 몇 가지 예선 시험을 통과할 시 ‘마스터’가 돼 옛 영웅의 인격을 재구축한 ‘서번트’를 받고 토너먼트에 참가해 승자를 가리게 된다. 이길 시에는 문 셀 오토마톤에게 소원을 빌 수 있다.
그렇다면, 외계기술로 제작된 슈퍼 컴퓨터인 문 셀 오토마톤이 어떻게 죽은 영웅들의 인격을 재구축할 수 있는 걸까? 설정상 문 셀 오토마톤은 지구가 생길 때부터 이미 존재해왔으며, 그 목적 중 하나가 지구의 관측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적인 정보수집 기능으로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사건을 신화 시대부터 기록해왔고, 이를 바탕으로 완벽히 재현된 옛 영웅의 인격 패턴을 재구축해 구현할 수 있었다.
이렇듯 페이트 EXTRA는 성인물 요소는 처음부터 배제한 대신, 포스트 아포칼립스 근미래 배경의 평행세계에서 벌어지는 전뇌화 테크노맨서들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벌이는 토너먼트라는 식으로 성배전쟁의 설정을 비틀었다. SF 색채로 신선함을 가미한 것이다. 또 다른 차이라면 원작과 달리 페이트 EXTRA의 문 셀 오토마톤이 진행하는 가상 성배전쟁은 총 128명이 참여한다. 덕분에 등장하는 영웅 캐릭터의 수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페이트 EXTRA는 이후 2016년과 2018년 각각 후속작인 페이트 EXTELLA와 페이트 EXTELLA LINK로 확장됐다. 이 둘은 페이트 EXTRA에서 바로 이어지는 내용이긴 하지만, 장르는 전작과 같은 던전 탐사 RPG가 아닌 소위 무쌍류 게임을 표방하고 있다. 두 게임 주요 스토리는 문 셀 오토마톤이 주관한 달의 성배전쟁 이후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권리를 받은 서번트들 간의 대립, 지구인의 이주, 과거 태양계에 방문했던 외계 종족 등의 이야기를 다룬다.
게임은 앞서 언급한 작품 정도지만, 소설와 영상물로 무대를 옮기면 페이트는 더 많은 작품을 낳았다. 소설은 페이트 제로를 제외하고도 2020년까지 도합 8개 라인업이 연재됐고, 영상물은 TVA부터 극장판까지 22개나 되는 물건이 나왔다. 여기에 만화책과 뮤지컬 등을 합치면 미디어믹스의 수는 훨씬 늘어난다. 물론 이들은 각각 서로 다른 원작을 갖고 있거나, 아예 저마다 다른 평행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평행세계를 하나로 모으는 ‘그랜드 오더’
비록 성배전쟁을 틀로 삼는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 외 부분에 있어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와 ‘이트 EXTRA, 그리고 여러 미디어믹스 작품들은 대체로 세계관이 공유되지 않는다. 설정으로 다변화하기 위해 평행세계라는 설정을 자주 사용한 탓이었다. 덕분에 익숙한 캐릭터의 재해석이 용이하기는 했지만, 반대급부로 페이트 시리즈만의 통일된 세계관이라는 느낌은 차츰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2015년, 여러 평행세계로 나뉜 페이트 시리즈를 모으는 게임이 발매됐다. 모바일 게임인 페이트 그랜드 오더였다. 물론 처음부터 페이트 그랜드 오더가 역대 설정을 정리하기 위해 기획된 게임은 아니었으나, 시나리오 작성 과정에서 분량이 늘어나며 결과적으로 이 게임은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평행세계 설정이 어떤 방식으로 엮이는지를 설명하는 장으로 기능하게 됐다. 플롯 특성상 페이트 시리즈 평행세계 설정에 대한 구조적 해설이 동반됐기 때문이다.
페이트 그랜드 오더의 스토리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페이트 그랜드 오더의 평행세계에서는 성배전쟁이 단 한 번만 발생했다. 그런데 당시의 승자였던 마술사가 자기 소원으로 인간 역사의 흐름을 관찰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설을 세울 자원을 원했고, 그 소원이 성취되며 초차원적 관측기관인 ‘칼데아’가 설립됐다. 칼데아의 목적은 말 그대로 잠재적인 미래와 평행세계들을 관측하고 앞으로도 인간 문명이 존속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칼데아는 창립자가 성배에 빈 소원을 통해 구축된 특별한 마법 설비 칼데아스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통해 지구의 영혼을 복사해 투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면 칼데아는 칼데아스에 투사된 지구 영혼을 특수한 관측기구들로 조사해, 앞으로 지구 모습이 바뀌어 나갈 잠재적 역사를 시뮬레이트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칼데아가 있는 세계에서는 마술사들이 정체를 드러내고 각국 정부 지원을 받아 수많은 평행세계들을 관측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평행세계도 무한히 많지는 않다.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는 유한하므로 평행세계가 일정 수 이상 늘어나면 이를 지탱하기 힘들어지면서 우주적 에너지 공급 흐름이 차단돼 일부 세계를 지워버리게 된다. 이때 어떤 우주를 지우는지에 대한 기준은 다소 모호한데, 얼마나 ‘안정적으로 번영한 미래가 보장되냐’ 여부다. 그리고 그러한 특정 목적성 하에서 에너지 효율이 좋은 평행세계들이 존재가 보장받고, 그렇지 못한 세계들은 지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안정된 역사 흐름을 지닌 평행세계들은, 일종의 중간 세이브 포인트가 설정된다. 예를 들어 히틀러가 죽고 나치가 패망하는 것이 향후 유익한 미래를 보장하는 분기라면, 나치의 패망은 바꿀 수 없는 역사적 필연으로 고정된다. 시간여행자 등의 개입으로도 그 역사는 바꿀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이브 포인트를 페이트 세계관에서는 ‘인리정초’라고 하며, 안정된 인리정초들의 흐름으로 구성된 항구적 평행세계들의 묶음을 ‘전정사상’이라고 한다.
페이트 그랜드 오더의 칼데아 기관은 이러한 인리정초와 전정사상을 관측해 이변에 대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페이트 그랜드 오더 시작 시점에서 칼데아는 갑자기 관측된 미래가 사라지고 1년 후 인류 문명이 멸망한다는 데이터를 얻는다. 이에 당황한 칼데아가 마술 장치로 마술사와 소환된 영웅인 서번트를 이변이 발생한 인리정초 지점에 보내 역사 흐름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페이트 그랜드 오더의 주된 줄거리다.
페이트 그랜드 오더는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계속 새로운 적이 나타나고 다른 방식으로 전정사상이 위협받게 된다. 그 규모는 갈수록 커지는데, 1부만 해도 인류를 멸하기 위해서 생겨난 신적 존재인 ‘비스트’들이 하나씩 등장했다. 비스트 중에는 솔로몬 왕의 72마신이 융합한 마왕이나,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 태초의 여신 ‘티아매트’ 등 신급 존재들이 존재한다.
여러 평행세계를 가로지르며 인간문명의 운명도 구해야 하고, 상대해야 하는 적도 신들 자체다 보니 자연 페이트 그랜드 오더는 다양한 캐릭터가 나와 연합전선을 벌이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또한 이 세계관에서는 애초에 비스트가 존재할 때를 대비해 선택된 특별한 영웅의 혼을 그랜드 서번트라고 부르며, 각각이 특정한 비스트를 상대할 때 최적 효과를 발휘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가 영웅 대 영웅이었다면, 이쪽은 반신과 신들의 싸움을 다룬 셈이다.
다만 페이트 그랜드 오더는 지금도 계속 스토리가 업데이트 되고 있으며, 서비스가 늦게 시작된 국내 업데이트는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상황이므로, 개략적인 시놉시스 외에 상세한 플롯은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너무 깊게 들어간 게 아닐까?
앞서 살핀 바와 같이 페이트 시리즈는 마술사가 지난 시대 영웅의 혼을 초혼해서 팀을 이루고, 함께 성배에 소원을 빌기 위해서 다른 팀과 배틀로얄을 벌인다는, 대중적으로 이해하기도 쉽고 흥미를 끄는 이야기 구조를 내세웠다.
성배전쟁이라는 제도화된 이야기 구조 덕분에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는 많은 팬 소설과 더불어 미디어 믹스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 페이트 시리즈는 수많은 평행세계 설정이 겹치면서 독자적인 개념들로 구성된 세계관의 복잡성이 증가하고 있다.
당장 페이트 그랜드 오더만 해도 그렇다. 1부는 그럭저럭 이해가 가지만, 2부부터 다른 별의 신이 등장하고, 그리스 신화 신들이 사실은 외계에서 온 거대 로봇이고, 평행세계들이 서로의 역사를 덮어쓰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등… 제대로 이해하면 흥미진진하지만 조금이라도 삐긋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거나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코어 팬들 입장에서는 이처럼 세계관이 깊이를 더할수록 즐겁지만, 신규 유저 입장에서는 ‘내가 아는 실존 영웅들이 재해석 돼 크로스오버 배틀로얄을 벌인다고 쉽게 접근했다가 금방 당황하기 십상이다. 지금까지 쌓인 고유 설정과 많은 이야기들이 그대로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이러한 방향이 페이트 시리즈의 장기적인 흥행에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