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딩 AI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인디 게임의 소스 코드와 디자인을 무단으로 복제하는 클론 게임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출시를 앞둔 1인 개발 게임 슬롯바운드 역시 중국의 대형 플랫폼 미니게임으로 무단 도용되는 피해를 입었다. 원작자는 철저한 해외 플랫폼의 감시와 복잡한 신고 절차 속에서도 팬들의 도움으로 대처하며 굳건히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 슬롯바운드 대표 이미지 (사진출처: 스팀 상점 페이지)
최근 게임업계에서 AI로 만든 '클론 게임'이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코딩 AI에 지시해 게임을 분석하게 만드는 '디컴파일(역분석, 역설계)'이 보편화되면서, 체험판이나 트레일러만 보고도 그럴듯한 유사 게임을 며칠 만에 만들어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0월 스팀 넥스트 페스트를 앞두고 해외 인디 게임 ‘푸키 가디스 샷 트릭’, 국내 인디게임 '스푸키친' 등이 AI 복제를 우려해 체험판 공개를 철회한 바 있다. “AI로 게임을 복제해 먼저 출시하겠다”는 협박 메일을 받았다는 개발자들의 증언도 나왔다.
물론 유사 게임이 정말 AI로 만들어졌는지는 하나하나 따져봐야 할 문제다. 다만 재미가 검증된 체험판과 이를 빠르게 재현할 도구가 동시에 존재하는 지금, 남의 게임을 베끼려는 이들에게 문턱이 크게 낮아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이미 게임을 도둑맞은 개발자가 있다. 오는 11월 10일 스팀 앞서 해보기를 앞둔 1인 개발자 '옵티마 아치(Optima Arch)'의 '슬롯바운드(Slotbound)'다.
▲ 슬롯바운드 공식 영상 (영상출처: 옵티마 아치 공식 유튜브 채널)
1인 개발 전략 오토 배틀러 '슬롯바운드'
옵티마 아치가 개발 중인 슬롯바운드는 슬롯머신과 오토배틀러, 로그라이크를 결합한 디펜스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3 X 3 슬롯머신을 돌려 줄을 맞추고, 맞춘 심볼에 따라 유닛을 소환한다. 이후 약한 유닛을 흡수시키거나 승급시켜 주력 유닛을 키우고, 끝없이 몰려오는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유닛마다 무작위로 붙는 능력치와 함께 각인, 아이템, 코어를 조합해 확률을 조작하고 시너지를 노리는 재미도 있다.
개발을 시작한 것은 지난 2025년 10월 경이다. 옵티마 아치는 원래 코딩도 아트도 모르는 비개발자였다. 해외에서 자라 영국에서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홀로 한국에 왔다. 그런 그에게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형이 바이브 코딩을 알려줬다. 옵티마 아치는 "처음에는 코딩이라는 말만 듣고 시도조차 안 하고 있다가,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wasd로 움직이는 네모가 있는 게임 만들어줘'라고 했는데 정말 제가 말한 대로 게임이 나왔다"라며 "그때 바로 '이거다, 게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슬롯 머신으로 캐릭터를 획득하는 '슬롯바운드' (사진제공: 옵티마 아치)
그 과정에서 여러 게임을 하던 중 '클로버핏(CloverPit)'을 플레이하다 심볼 3개가 맞춰지는 순간을 발견하고,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옵티마 아치는 "심볼 3개가 예를 들어 '창창창'이고 나를 위해 싸우는 창병이 나오면 너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당연히 그런 게임이 있겠지 하고 찾아봤는데 없었고, 슬롯머신 전투 게임은 많았지만 1 대 1 전투이거나 슬롯머신이 공격력이나 방어력을 올려주는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슬롯바운드 개발에 돌입, 체험판을 지난 6월 itch.io, 7월 스팀에 공개했다. 이후 전장 크기 확대, 랜덤 옵션 대규모 개편 등 체험판 업데이트도 꾸준하게 진행했다. 게임 자체의 재미와 더불어 성실한 개선 덕분인지 체험판은 '매우 긍정적(82% 긍정)' 유저 평가를 받았다. 출시 전부터 위시리스트 10만 건을 넘겼고, 잠시 동안 스팀 체험판 동시접속자 2위를 기록하며 주목 받기도 했다. 이런 주목이 독이 될지는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 슬롯바운드 위시리스트 10만 기록 (사진제공: 옵티마 아치)
▲ 슬롯바운드 스팀 체험판 순위 (자료출처: steamdb)
중국에 무단으로 발매되어 버린 슬롯바운드
슬롯바운드를 베낀 게임이 나온 곳은 스팀이나 구글 플레이가 아니라 중국의 '도우인'과 '위챗'이었다. 국내 게이머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두 앱 모두 중국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대형 플랫폼이다. 도우인은 바이트댄스가 운영하는 '중국판 틱톡'이고, 위챗은 텐센트가 서비스하는 중국 최대 메신저다. 두 앱에는 '미니게임(미니프로그램)'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별도 설치 없이 앱 안에서 바로 실행되는 가벼운 게임으로, 주로 광고나 인앱 결제로 수익을 낸다. 이용자가 많아 접근성이 높지만, 중국 내수 중심이라 해외 개발자는 들여다보기조차 어렵다.
처음 발견된 것은 지난 9월 도우인에 올라온 '군단훼멸대전'이다. 개발자는 이 게임이 슬롯바운드의 UI와 아트, 유닛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결제 시스템까지 추가해 직접 수익까지 내고 있었다. 개발자는 "첫 개발이었던 만큼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를 등지고 혼자와의 싸움을 길게 해왔다"라며 "그런 게임으로 다른 사람이 저보다 먼저 수익을 내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정말 무거웠다"고 전했다. 이후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고, 한 중국인 팬이 플랫폼에 대신 신고해 줬다. 얼마 뒤 게임은 내려갔고, 바이두에서도 더는 검색되지 않았다.
▲ 처음 발견된 '군단훼멸대전', 원작을 상당부분 모방했다 (사진제공: 옵티마 아치)
그러나 10월에는 위챗에 더 정교한 모방작이 등장했다. 제목부터 '슬롯'을 음차한 듯한 '사락탁전기'다. 이번에는 중국 커뮤니티에서도 '개발자가 알고 있나?'라는 글이 오갈 정도로 흡사했고, 개발자는 스팀 커뮤니티에서 한 중국 유저의 제보로 이를 알게 됐다. 이번에는 직접 신고하려고 위챗 사이트를 번역해 가며 필요한 내용을 모두 작성했지만, 한국에서는 신고가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9월에 도움을 줬던 중국인 팬이 다시 신고를 진행해줬다. 위챗 공식 플랫폼 신고 접수 내역을 보면, 신고는 10월 20일 '미니프로그램(미니게임) 콘텐츠 권리 침해' 항목으로 접수됐고 플랫폼은 7영업일 안에 심사하겠다고 안내했다.
두 게임 모두 AI를 활용한 디컴파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개발자의 판단이다. 그는 “9월 도우인 게임은 AI로 살짝만 변형해서 낸 수준이었고, 10월 게임도 AI를 적극 활용해서 낸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정황도 이를 뒷받침한다. 슬롯바운드 체험판이 공개된 것은 7월 초이고, 도우인에서 첫 복제작이 발견된 것은 불과 두 달 뒤인 9월이다. 소스 코드도 없는 체험판을 두 달 만에, 그것도 PC게임을 모바일로 포팅한 셈이다. 인디게임 업계에선 AI가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 10월 올라온 '사락탁대전' (사진제공: 옵티마 아치)
위험에 노출된 인디 개발자들
이번 사례에서 드러난 첫 번째 문제는 피해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어렵다는 점이다. 구글 플레이나 스팀 같은 글로벌 플랫폼과는 다르게, 도우인과 위챗 미니게임은 해외 개발자가 직접 살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옵티마 아치는 "중국 사람이 아니면 접근하기가 힘든 플랫폼이다 보니, 계속 한 번씩 찾아보지 않는 한 사전에 인지할 방법은 없지 않나 생각한다"라며 "저도 제 게임의 중국 팬분들이 아니었다면 알지도 못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발견하더라도 신고가 쉽지 않다. 중국 플랫폼은 해외 접속이 막힌 곳이 많고, 가입이나 신고를 하려 해도 현지 휴대폰 인증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옵티마 아치는 "가입을 하려고 하거나 뭘 하나 누르면 보안문자부터 휴대폰 개통 같은 알림이 뜨는데, 그때마다 번역기를 돌려도 결국에는 접속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라며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는 중국 관계자가 최소 한 분은 있어야 (신고가) 가능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 위챗 신고 이미지 (자료제공: 옵티마 아치)
대형 게임사라면 법무팀을 통해 즉각 현지 대응에 나섰겠지만, 1인 개발자에게는 그런 조직이 없다. 슬롯바운드가 기댈 수 있었던 곳도 결국 유저뿐이었다. 옵티마 아치는 "사실 저는 거의 한 게 없고, 중국 팬분께서 신고할 때 필요한 정보들을 그때그때 물어보셔서 소통하면서 중국 팬분 주도하에 신고할 수 있었다"라며 "저도 사실상 신고 화면 같은 건 거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체험판을 내지 않을 수도 없다. 마케팅 예산이 부족한 인디 개발자에게 체험판은 게임을 알릴 가장 확실한 수단이고, 스팀 넥스트 페스트 같은 행사 역시 체험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슬롯바운드가 출시 전부터 위시리스트 10만 건을 모은 것도 체험판 덕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중국 미니게임 플랫폼이나 로블록스 같은 곳에 또 다른 복제작이 퍼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개발 마무리만으로도 벅찬 인디 개발자가 그 모든 곳을 하나하나 찾아다닐 수는 없다.
▲ 디컴파일로 인해 아이디어를 채가는 피해가 늘고 있다 (사진출처: 스팀 상점 페이지)
고난에도 개발 이어가는 슬롯바운드
1년 넘게 공들여 만든 게임을 남이 베껴 먼저 돈을 버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정작 원작자는 아직 출시도 하지 못해 한 푼도 벌지 못한 상황이라면, 허탈감과 자괴감에 개발 의지가 꺾여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옵티마 아치는 흔들리지 않고 출시를 향해 묵묵히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또 옵티마 아치는 체험판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는 “AI로 인해 게임업계가 많이 뒤숭숭한데, 그래도 조금은 잠잠해지고 안정되는 시기가 올 거라고 개인적으로 믿는다”며 "체험판을 공개하는 것에 있어서는 여전히 공개해도 된다는 생각이며, AI로만 만든 카피 게임보다 더 잘 만들고 마케팅도 더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여전히 스팀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슬롯바운드 체험판 (자료출처: 스팀 상점 페이지)
슬롯바운드는 오는 11월 10일 스팀 앞서 해보기를 앞두고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다. 옵티마 아치는 "제가 잘나서 게임이 잘된 것도 아니고, 제가 대단해서 관심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며, “여러분들이 제 게임을 플레이해 주시고 찾아주신 덕에 힘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슬롯바운드가 끝이 아니라고도 강조했다. 옵티마 아치는 "성공과 돈도 물론 중요하지만, 저는 이 게임만 만들고 사라질 사람이 아니고 앞으로도 쭉 만들고 싶은 게임이 많기에 플레이어들과의 신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라며 "떨리지만 진심과 애정과 의도가 게이머들에게 잘 전달되길 바랄 뿐이며, 아직 출시도 안 한 부족한 게임을 좋게 봐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