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의 일기, 아직도 내가 힐링게임으로 보이니
2021.03.12 10:45게임메카 서형걸 기자
RPG 메이커는 쯔꾸르, 알만툴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도 친숙한 게임 제작 도구다. 프로그래밍 지식이 없는 초보자도 게임을 만들 수 있는 도구로, 투 더 문처럼 호평 받은 명작 인디게임을 배출해낸 창구이기도 하다. 국내 인디 개발팀 파란게 프로젝트가 만든 루시의 일기(Diary of Lucie)도 이 RPG 메이커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작년 초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 성공에 이어 11월 스팀 정식 출시, 그리고 12일 스마일게이트 스토브로 나온 이 게임은 개발자가 직접 아이작의 번제와 엔터 더 건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다소 괴기스러운 면모를 앞세운 두 게임과 달리 전체적으로 몽환적이고 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될 것만 같은 분위기가 눈길을 끈다. 아름드리 나무에 기댄 채 잠에서 깬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주인공 루시를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이 게임에서 이토록 강렬한 ‘매운맛’이 느껴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 같은 반전매력이 루시의 일기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감미로운 뉴에이지풍 음악에 아기자기한 도트, 첫인상은 ‘힐링’
루시의 일기는 숲 속에서 잠에서 깬 주인공 루시를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한눈에 봐도 정성이 느껴지는 도트 그래픽은 도트 게임 마니아의 취향을 저격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또한 조금 어둡긴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숲과 귀여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루시까지, 이 게임이 힐링게임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자 누구인가?
감미로운 음악 역시 힐링게임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OST는 풍부한 피아노 선율 위에 묵직한 드럼 비트가 수놓아진 뉴에이지풍 음악인데, 플레이 내내 귀가 즐거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또한 거점에 있는 피아노를 주인공 루시가 연주할 수 있는데, ‘교향시의 아버지’ 프란츠 리스트의 Liebestraum(사랑의 꿈) 같은 피아노 명곡도 감상할 수 있다.
힐링 분위기에 심취해 튜토리얼 진행하다 보면 커다란 저택에 이르는데, 입장과 동시에 저택에 갇힌다. 게다가 저택 내부에 위치한 방 안에는 ‘마리’라는 이름의 활발(다소 부산스럽기까지 한) 여자애가 갇혀있다. 그렇게 마리와 함께 저택을 탈출하기 위해 내부를 조사하던 중 의미심장한 내용이 적힌 일기를 발견하고, 곧이어 등장한 커다란 낫을 들고 검은색 로브를 입은 괴한을 피해 도망친다. 본격적인 매운맛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리저리 구른 당신, 죽음을 맛보시라
루시의 일기의 정체는 로그라이크 요소가 가미된 탄막 액션게임이다. 무작위로 생성되는 스테이지를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처치하고 아이템과 스킬을 얻다 보면, 보스를 만나게 된다. 보스를 물리치면 다음 맵으로 넘어간다. 만약 도중에 사망하면 얻은 아이템과 스킬, 돈을 모두 잃고 거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거점에는 꼭 필요하긴 하지만 성능은 좋지 않은 활, 지팡이, 검 등 기본무기 3종, 난이도 조절 메뉴, 펼치면 전투로 넘어갈 수 있는 일기장, 피아노, 커다란 상자 등이 있다. 커다란 상자가 게임 공략의 키 같은 존재인데, 상자를 열면 무작위로 아이템 하나가 나오기에 맨손으로 스테이지를 시작하는 것보다 진행이 훨씬 수월해진다. 그러나 한가지 까다로운 전제조건이 하나 있는데 상자상 열 때 스테이지 진행도에 따라 얻는 특수 재화인 ‘크레딧’을 소모해야 한다. 즉, 상자를 열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죽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루시의 일기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는 피지컬, 하나는 운이다. 인터넷서 밈으로 회자되는 한 농구감독의 발언과 비슷하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몬스터, 특히 보스들이 뿜어내는 탄막은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패턴이 기상천외해 동체시력으로 그 움직임을 읽고 손이 즉각 반응하지 않는다면 루시가 드러눕게 된다. 탄막을 피할 수 있는 회피는 무적판정인데다가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마나를 회복시키기 때문에 여러모로 유용한 기술이지만, 스태미나 제한이 있어 난사할 수는 없다. 탄막 슈팅게임이나 템포 빠른 액션게임에 익숙한 게이머라면 큰 어려움 없이 전진할 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죽으면서 익숙해지는 것이 답이다.
또한 로그라이트이기에 매 회차마다 맵 구조, 등장 보스와 몬스터, 상자 및 상점에서 나오는 아이템 등이 무작위다. 즉, 운이 좋고 나쁨에 따라 게임 진행 정도에 큰 차이가 발생한다. 좋은 아이템과 스킬로 완전무장할 수 있으면 수월하게 플레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키보드 부숴질 정도로 손을 격하게 움직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좋은 아이템을 얻었다 해서 끝까지 안심할 수도 없는데, 무기에 내구도가 있어 제때 수리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다. 기껏 열심히 강화까지 한 무기를 쓰지 못하게 되는 것만큼 허탈한 일은 없다.
이처럼 어려운 게임이지만, 죽음이 반복되더라도 포기하자는 생각보다는 ‘거기서 반 박자만 빨랐다면’, ‘더 좋은 스킬을 얻을 수 있었다면’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딱 한 대만 때리면 클리어하는 순간에 죽는 경우가 많아 왠지 모르게 오기가 생긴다. 어려운 것은 맞는데 난이도 조절이 절묘하다고 할까? 게다가 2~3번 죽으면 거점에서 난이도 조절을 설명해주는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동료 마리가 “고난이도는 너한테 아직 이르다”고 도발한다. 게이머라면 이러한 도발을 참지 못할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장을 볼 수 밖에 없다.
‘쯔꾸르 명작’ 향기가 난다
회피 후 이어지는 특수공격, 탄막 쳐내기, 일반 공격과 스킬 연계 등 루시의 일기의 또 다른 장점은 스타일리시한 액션이다. 여기에 손맛도 훌륭한 편. 앞서 언급한 높은 난이도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액션게임으로서의 완성도는 수준급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사망 시 소량의 크레딧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잃기 때문에, 죽음이 반복되다 보면 약간 허탈한 기분이 든다. 로그라이트에서 리셋을 아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신 수집했던 스킬이나 아이템, 만난 몬스터들을 모아 볼 수 있는 도감이라도 있다면 게임 진행에 동기부여가 될 것 같다. 아울러 제공하는 크레딧 양을 조금 더 늘린다면, 이러한 액션게임에 익숙치 않은 게이머들도 한결 더 수월하고 즐겁게 게임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루시의 일기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나가는 ‘앞서 해보기’ 게임이다. 실제로 앞서 해보기 시작 후 꾸준한 업데이트로 초기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 됐다. 앞으로도 게임을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간다면 누구나 인정하는 ‘쯔꾸르 명작’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현재로도 1만 500원 가격에, 차고 넘치는 재미를 선사하는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