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1은 없고 2만 있다? 복잡한 ‘듄’ 게임화 사연
2020.01.18 15:47 게임메카 이새벽
RTS의 효시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제나 언급되는 작품이 있다. 바로 웨스트우드의 듄 2다. 이 게임은 오늘날 RTS의 기본 요소인 전장의 안개, 자원, 유닛 생산, 세밀한 직접 컨트롤 등을 성립한 작품으로, 게임 역사에서 듄 2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온 지 워낙 오래된 게임이다 보니, 많은 게이머들이 의외로 듄 시리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특히나 전작인 듄 1이나 원작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시피 하다. 사실 듄은 게임이 아닌 소설로 시작된 프랜차이즈로, 소설에서 훨씬 더 큰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오늘은 RTS 장르에 새 장을 열었다는 듄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굴곡진 게임화의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도달했는지 확인해본다.
희소자원 ‘멜란지’를 중심으로 한 우주 봉건 정치물 듄
게임업계에서 듄은 RTS 장르의 시초가 된 것으로 유명하지만, 소설 분야에서 듄은 게임보다 더 큰 영향을 남겼다. 가상의 사막 행성 ‘아라키스’에서만 채취되는 신비한 향신료 ‘멜란지’를 놓고 벌어지는 우주 제국의 전쟁을 그린 이 소설은, 흥미진진한 SF 모험담 속에서도 기술이 문화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 역사적 필연 속에서 개인이 갖는 의미 등 꽤 묵직한 주제들을 다룬 것으로 유명하다.
동시에 듄은 우주 봉건제라는 독특한 설정을 정착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듄에는 인류가 발달한 기술을 바탕으로 우주에 진출했으나, 사회는 황제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전근대적인 봉건제가 나온다. 여기서 영주들은 행성을 각자의 봉토 삼아 군웅할거를 한다. 요즘은 이러한 우주 봉건제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 워해머40K 등 적지 않지만, 그 효시를 찾아보면 대개는 바로 이 듄에 뿌리를 둠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토록 다양한 매체와 장르에 깊은 영향은 남긴 듄은 어떤 내용일까? 우선 소설 듄은 1965년 기자 출신 SF 작가 프랭크 패트릭 허버트에 의해 탄생했다. 당시 그는 한 잡지에 오레곤 주 모래사막에 대한 기사를 기고하느라 자료수집 중이었다. 기사 내용은 미국 농무부가 주도한 모래사막 이동 저지 사업이 반대로 지역 환경과 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결국 이 기사는 너무 분량이 길어지는 바람에 기고되지 못했다. 그 대신, 소설 듄의 바탕이 됐다.
듄의 개략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먼 미래에 인류는 자신의 행동은 물론이고 사고까지 인공지능 기계에 위탁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을 발달시킨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첨단기술 탓에 인간의 주체적인 사고는 퇴보하게 되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기계의 도움을 거부하고 자립할 것을 요구하는 ‘버틀레리안 지하드’라는 파괴 운동이 벌어진다. 소설 시작 시점에서 인간은 ‘버틀레리안 지하드’로 인공지능이나 체외 수정 등 복잡한 기술을 모두 파괴한 상태다.
이후로 듄 세계관의 인간은 모든 종류의 ‘생각하는 기계’ 사용을 엄히 금한다. 대신 첨단기술이 활용되던 영역을 인간으로 대체하는데, 이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과거 유전자 개량된 인간을 오랜 세대 동안 세심하게 교배하거나 특별한 화학물을 섭취하게 해 특이한 능력을 지니게 된 이들이다. 소설 듄에는 이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간을 양성하는 기관이 여럿 등장하며, 이 기관들은 각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을 양성해 공급하는 대가로 권세를 누린다.
소설과 게임 양쪽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향신료 ‘멜란지’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멜란지’는 모래로 뒤덮인 사막행성 ‘아라키스’에서만 채취되는 대단히 희귀한 물질인데, 이를 장기간 복용하면 신체 노화가 중단되고 정신적으로도 개화된다. 특이한 점은 이렇게 ‘멜란지’ 복용을 장기간 한 이들 중 일부는 기묘한 중독 상태에 빠지며 미래를 계산하고 예지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멜란지’ 복용을 통해 미래를 예지할 수 있게 된 이들은 앞으로 닥칠 사건들을 볼 수 있고,이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추론이 가능해진다. 예컨대 과거에는 고도의 인공지능이 연산하던 우주선의 초광속 이동은, 이제 우주 길드의 항법사라 하는 특별한 인재들이 ‘멜란지’ 중독 상태에서 하는 예지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컴퓨터에 의한 계산이 아니라 약물로 정신의 힘을 증폭시킨 돌연변이에 의해 우주선을 운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멜란지’가 중요하다 보니 듄 세계관의 권력자들은 ‘멜란지’의 유일한 채굴지인 ‘아라키스’ 행성을 늘 통제하고자 한다. 하지만 워낙 많은 세력이 ‘아라키스’를 둘러싸고 경쟁하다 보니, 자연 소설 시점에서는 나름의 협정이 맺어진 상태다. 여기에는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황제를 중심으로 한 우주 제국이 존재하는데, 은하계 여러 조직이 공통적으로 ‘멜란지’를 필요로 하다 보니 자연 ‘멜란지’ 채취와 유통을 위해 단일한 제국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재능에 의존하는 사회이다 보니, 듄 세계관은 미래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 전근대적인 모습을 띈다. 기술 및 제도의 한계로 은하계를 한 집단이 통제할 수 없어 황제를 중심으로 여러 귀족이 행성을 봉토로 받아 통치하는 ‘우주 봉건제’만 해도 그렇다. 더 나아가면 광학병기가 보호막과 충돌하면 핵폭발을 일으키는 기술적 문제 탓에 레이저 총을 안 쓰고 여전히 칼과 실탄무기를 쓰는 등, 흔히 연상하는 SF 배경과는 조금 다르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이렇듯 ‘멜란지’를 둘러싼 여러 조직들, 그리고 각 조직에 속한 이들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드라마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에 실제 소설에는 자신이 소속된 진영의 이해관계와 개인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나, 예언의 힘으로 예정된 운명을 타파하고자 하나 결국 개인의 힘만으로는 사회를 이기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치는 전통적 비극상, 기술과 환경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인간의 의도를 뛰어넘는 환경적 서사 등이 다뤄진다.
이처럼 소설 듄은 흥미로운 설정과 서사로 큰 관심을 받았다. 이에 당연히 트랜스미디어 또한 계속 진행되었는데, 소설의 복잡성 탓에 원작 여러 요소 중 일부만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1984년 개봉한 영화 듄은 제국 비밀결사의 선택적 교배와 ‘멜란지’ 중독을 통해 전지적인 예언능력을 얻은 주인공 ‘폴 무앗딥’이 새로운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뤘는데, 스크린에 제한된 내용만 담으려다 보니 이야기를 단순한 초인 영웅물로 단순화시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듄의 영향을 받은 게임은 많지만, 영화처럼 일부 소재에 한정하여 모티브를 따온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폴아웃 시리즈에는 ‘멘타츠(Mentats)’라는 정신에 영향을 주는 약이 있는데, 이는 듄에서 뛰어난 연산능력을 지니도록 양성된 특수인간 ‘멘타트(Mentats)’의 오마쥬다. 또한 워해머40K는 인공지능을 배격하며 신통력을 지닌 황제를 정점으로 삼은 몰락해가는 우주 제국이라는 모티브를 거의 그대로 차용하기도 했다.
정식 라이선스를 받은 듄 게임도 원작의 일부 소재만 활용했다. 게임은 원작의 여러 요소 중 모두가 노리는 희소한 자원 ‘멜란지’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러한 자원 경쟁 디자인은 훗날 RTS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1은 없고 2만 있는 거 아냐? 듄 2의 게임화 사연
엄밀히 말하면 듄 첫 게임화는 보드게임에서 진행됐다. 1979년 아발론 힐에서 정식 라이선스를 얻어 제작한 보드게임 듄이 시초다. 이 게임은 사막행성 ‘아라키스’에서 다양한 진영이 ‘멜란지’가 생성되는 지역을 놓고 군사적으로 충돌하거나 정치적 압박을 가하며 경쟁하는 내용이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땅따먹기와 정치를 결합한 보드게임이었던 셈인데, 그 중심에 자원 ‘멜란지’가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듄이 비디오게임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보다 훨씬 나중인 1992년이다. 당시 프랑스 게임 개발업체인 크이요(Cryo)는 스토리 중심 어드벤처 게임을 주로 제작하는 회사였는데, 배급사인 버진게임스의 도움으로 듄 게임을 만들게 됐다. 게임 듄은 소설 1~2부 주인공인 ‘폴 무앗딥’의 행보를 따라가는 스토리의 포인트 앤 클릭 방식 어드벤처에, 탑 다운 방식의 전략 게임 요소를 약간 추가한 복합적 구성을 취했다.
듄 게임은 발매 첫 주 약 2만 장이 판매됐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꽤 고무적인 수치였다. 이 게임은 당대 게임 잡지들에서 ‘쉽고 흥미로운 진행 방식에 뛰어난 스토리와 음악을 녹여냈다’며 높은 점수를 받았고, 1997년까지 30만 장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게임은 결과적으로 훗날 대중에게서 거의 잊혀졌는데, 그 이유는 같은 해 출시된 다른 듄 게임 때문이었다.
위에서 말한 배급사 버진게임스는 크이요에 맡긴 어드벤처 게임 듄 외에도 또 하나의 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게임이 바로 훗날 RTS의 효시로 불리는 웨스트우드의 듄 2다. 다만 이 게임은 '2'라는 넘버링에도 불구하고 크이요의 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전혀 별개의 프로젝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가 붙은 데는 당시 개발 과정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면 크이요의 듄은 개발을 취소하고 웨스트우드가 듄 1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크이요가 듄 개발에 착수한 초기에, 버진게임스는 크이요의 개발 방식과 진척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게다가 당시는 아직 버진게임스와 크이요가 정식 계약을 맺기 전이었기에, 버진게임스는 일방적으로 어드벤처 게임 듄 개발을 백지화하고 다른 개발업체에 일을 맡길 예정이었다. 동시에 버진게임스는 아예 듄 라이선스로 어떤 게임을 만들지도 다시 고민했는데, 그 때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보드게임 듄의 ‘자원 기반 전략 게임’이라는 콘셉트였다.
다만, 비디오게임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서는 보드게임과 똑같은 방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이에 버진게임스는 1989년 세가에서 출시한 ‘헤르조그 쯔바이(Herzog Zwei)’ 시점을 참고해 탑 다운 방식 전략 게임을 만들기로 하고, 이를 당시 물망에 오른 전도유망한 개발업체 웨스트우드에 맡겼다. 극초기 RTS 틀을 바탕으로 자원 수집과 병력 생산이라는 보드게임 요소를 추가한 셈이었다.
그런데, 웨스트우드가 한참 듄을 개발 중일 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듄 개발을 포기한 줄로 알고 있던 크이요가 실은 비밀리에 어드벤처 게임 듄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있었으며, 이를 갖고 와 버진게임스를 설득한 것이다. 이 프로토타입은 완성도도 탁월해, 버진게임스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크이요의 듄도 개발이 승인돼 버렸다. 한참 듄을 개발 중이던 웨스트우드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배다른 형이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하필 크이요와 웨스트우드의 듄은 발매 시기도 1992년으로 엇비슷했다. 이에 버진게임스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늦게 출시된 웨스트우드 게임에 듄 2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사연으로 웨스트우드는 크이요와 아무 상관없는 게임을 만들고도 졸지에 듄 2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조금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다. 실제로 웨스트우드의 듄 2가 다른 게임의 후속작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1992년 12월 출시된 듄 2는 흡사 보드게임 듄에 ‘헤르조그 쯔바이’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듯한 모습이었다. 게임은 소설에 나오는 ‘아트레이드’와 ‘하코넨’ 두 가문에 더해, 소설에는 나온 적 없는 ‘오르도스’ 세 가문이 ‘아라키스’ 행성에서 ‘멜란지’를 두고 전투를 벌인다는 내용을 담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보드게임 듄과 별로 다를 바 없지만, 웨스트우드의 듄 2는 게임성에서 큰 차이를 두었다.
웨스트우드 듄 2는 보드게임과 달리 정치적 요소를 싹 제거하고,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전투에만 초점을 맞췄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맵 곳곳에 산재한 자원인 ‘멜란지’를 채취하고, 이를 소모하여 시설을 개발하고 군대를 생산할 수 있었다. 또 이 군대를 직접 세밀하게 조작해 더 많은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것도 가능했다. 즉 이 게임은 보드게임의 전략성에 실시간 전투를 직접 조작하는 액션성이 결합된 독특한 묘미를 갖고 있었다.
듄 2는 외에도 전장의 안개, 진영 별 특성 등 당시까지 없던 새롭고 독특한 요소를 다수 선보였다. 덕분에 듄 2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뒀다. 판매량만 보면 듄 2는 1996년까지 총 25만 장이 판매됐으니 크이요의 듄과 비슷하거나 살짝 밀렸다. 하지만 그 여파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게임시장 전체에 새로운 흐름을 몰고 온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듄 2에 영향을 받은 RTS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계승작품으로 여겨지는 웨스트우드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는 물론이요, 블리자드의 ‘워크래프트’ 시리즈도 개발자가 공공연히 듄 2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힐 정도였다. 여기에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KKND 등 유수의 작품들이 쏟아지며 RTS 장르는 90년대 중후반 대세 장르로 떠올랐고, 이후 등장하는 AOS 탄생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울듯, RTS의 인기도 2000년대 중반 들어 저물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두에도 웨스트우드의 듄 시리즈가 있었다. 1990년대 초 RTS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 2000년대 장르 몰락에도 앞장선 셈이다.
시작은 장대했지만 끝은 초라했다, 듄의 몰락
듄 2 이후로도 듄은 다양한 게임으로 제작됐다. 1997년에는 프랭크 허버트의 아들이자 후속 작가인 브라이언 허버트와 카드게임 제작 라이선스를 맺은 파이브 링 퍼블리싱 그룹에서 TCG를 내놓으며, 2000년에는 던전 앤 드래곤으로 유명한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에서 TRPG 듄: 제국의 연대기를 출판하는 등 다방면으로 확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정작 게임업계에 듄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웨스트우드는 당시 큰 고난을 겪고 있었다.
문제는 1998년 버진 그룹이 재정난으로 웨스트우드를 EA에 판매하며 시작됐다. EA 산하로 들어간 후 기존 웨스트우드에서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 다수가 파기됐고, 다수의 고참 개발자가 퇴사한 것이다. 어쨌거나 EA는 그와 상관없이 버진게임스에게 넘겨받은 듄 IP로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길 원했다. EA에게는 1998년 출시될 스타크래프트에 맞서 RTS 시장에서 주도권을 지킬 신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EA 측은 웨스트우드의 듄 2를 당시 기술 수준에 맞게 리메이크한 듄 2000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애초에 듄 2000은 웨스트우드 게임을 바탕으로 만들었을 뿐 웨스트우드에서 만든 게임이 아니었다. EA는 다른 영국 게임 개발 업체인 인텔리전트 게임스에 하청을 줘 이 게임을 제작했다. 하지만 그래픽을 조금 개선하고 멀티플레이어 모드를 추가했을 뿐 기본적인 게임 구성은 1992년에 나온 듄 2와 거의 다르지 않은 나태한 모습을 보였다.
듄 2000의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당대 기준으로 그래픽을 개선했다고는 해도 그 수준이 썩 좋지 않았고, 원작과 달리 유닛 간 밸런스 문제도 심했다. 이에 전작의 향수를 기대한 많은 게이머들이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듄 2의 진짜 후계자는 2001년에야 비로소 출시됐다. 웨스트우드가 제작한 RTS ‘엠퍼러:배틀 포 듄’이 그 주인공이었다. 엠퍼러:배틀 포 듄은 웨스트우드 독자 스토리로, 소설에서는 진영과 특수부대 콘셉트 등 일부 설정만 따왔다. 게임 자체로 보면 자원 중심의 실시간 전략게임이라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속도감을 높이고 유닛간 밸런스를 세심하게 조정한, 준수한 RTS였다.
하지만 당시 RTS 시장은 그 정도로는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레드 오션이었다. 스타크래프트 성공 이래 수많은 비슷한 RTS가 발매돼 치고 박는 상황에서, 엠퍼러: 배틀 포 듄은 시장의 냉담한 반응 속에 저물 수밖에 없었다. 이미 EA 흡수 이후 계속된 불화와 실적 미진으로 곤란을 겪던 웨스트우드는 엠퍼러: 배틀 포 듄의 실패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RTS를 만들지 못했고, 이후 세 개의 소규모 게임을 더 만든 후 2003년 문을 닫고 말았다.
듄 2로 RTS의 시대를 연 웨스트우드가 엠퍼러: 배틀 포 듄으로 수미상관을 이루며 퇴장한 후, 듄의 게임화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됐다. 최초의 듄 비디오 게임을 만든 프랑스 개발업체 크이요가 2001년 다시금 듄 게임에 도전한 것이었다. 다만 이 게임은 소설이 아니라 당시 방영되던 미니 시리즈 ‘프랭크 허버트의 듄’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어쨌거나 이 게임은 전작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결과를 맞았다.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미니시리즈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잠입 어드벤처 게임으로 기획됐지만, 사실 애초에 크이요는 당시에 게임을 제대로 제작할 상황조차 아니었다. 이미 재정난으로 파산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회사가 내일을 기약 못하는 상황에서 게임이 제대로 제작될 리 없었으니,당연히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판매량도 저조하고 게임성도 신랄한 비판을 당했다. 당시 북미 게임잡지 게임스팟은 이 게임을 ‘길게 말할 필요 없이 비참한 게임’이라고 평했다.
프랭크 허버트의 듄 발매 이후 크이요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비슷한 정도로 참담한 수준의 게임을 무려 20개나 제작하며 발악하듯 버텼으나, 끝내 파산했다.한때 성공적으로 게임 프랜차이즈로 정착하며 새로운 장르의 장을 열기도 했던 듄 치고는 다소 안타깝고 초라한 끝이었다.
과거의 유산으로 끝날까, 아니면 희망이 남았는가?
사실 듄은 원작도 뒷심이 썩 좋지는 않다. 원작자 프랭크 허버트의 뒤를 이어 아들인 브라이언 허버트가 듄 세계관의 여러 작품을 추가로 썼지만, 대부분 아버지가 쓴 소설 서사에 반하는 설정을 추가로 붙이면서도 우수한 작품성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소설이나 게임이나 초기 작품들에 비해 나중에 나온 작품들의 질이 영 좋지 않아 프랜차이즈가 빛 바래고 있는 사정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러나 아직 듄 프랜차이즈가 끝장났다고 보기는 이르다. 2020년 영화 듄이 개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시카리오’와 ‘블레이드 러너 2049’ 등을 제작한 드니 빌뇌브라고 하니, 기대를 걸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1984년 영화 듄이 개봉한 후 게임 제작에도 불이 붙었던 걸 감안하면, 어쩌면 이번 영화로 새로운 듄 게임화 시대가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